이번에 읽은 책은『관내분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과 가작을 수상한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입니다.
SF소설『방금 떠나온 세계』는 한 번쯤 세상과 어긋난 적 있는, 소외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작품이에요. 이 글에서는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정과 줄거리를 소개합니다.
줄거리와 후기
김초엽 작가의『방금 떠나온 세계』에는 총 7편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어요. 각 작품은 독특한 세계관과 감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 기술과 감정, 이해와 오해 사이의 경계를 섬세하게 탐구합니다.
1. 최후의 라이오니
주인공은 감정이 풍부한 복제인간 '로몬'으로, 멸망한 도시 3420ED를 탐사하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구원자로 믿는 기계 '셀'과 하위 기계들을 만나게 됩니다. 셀은 과거 자신들을 돌봐주었던 인간 '라이오니'가 돌아왔다고 착각하고, 주인공은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라이오니인 척합니다. 결국, 그는 셀과 기계들, 그리고 도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맞이하고, 구조되어 로몬탑으로 복귀합니다. 공감과 연대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셀을 만난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도시를 지키며 소리 내어 웃고 있다. 파편들이 셀의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아닌 라이오니가 있다. 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 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원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후이자 유일한 존재였던 라이오니의 모습을.
2. 마리의 춤
무용 강사인 화자는 시지각 이상증을 가진 '모그'라는 존재인 마리에게 춤을 가르치게 됩니다. 모그들은 '플루이드'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서로의 움직임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리는 콘서트 무대에서 '모그'가 가지는 시지각 이상증을 일으키는 전환물질이 담긴 안개를 관객들에게 뿌리는 사건을 일으키고, 이후 사라집니다. 이 사건은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이해 부족을 드러내며, 다양성과 포용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창밖의 해가 천천히 기울며 다른 색의 빛줄기를 탁자 위로 비추었다.
빛은 얼마나 상대적인 것일까?
문득 나는, 어딘가에서 춤을 추고 있을 마리를 생각했다.
마리는 여전히 목각인형처럼 춤을 출 것이다. 동작들은 허공에 계산된 궤적만을 긋고 사라질 것이다. 아름다움은 표면 아래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3. 로라
저널리스트 진은 고유수용감각의 이상으로 세 번째 팔의 감각을 느끼는 연인 로라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이해의 차이를 탐구합니다. 로라는 결국 기계 팔을 이식받기로 결심하고, 진은 그녀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을 취재하며 여행을 떠납니다. 이 이야기는 타인의 선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합니다.
그 팔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했으며 지독한 기름 냄새가 났습니다. 힘 조절을 못 해 부품들이 제 어깨를 찔러댔고, 공기 중으로 노출된 인공 근육이 제 뺨을 건드렸습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었어요. 로라는 제가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세 번째 팔을 늘 고통에 동참시켰고요. 이번에도 그랬죠.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빠지는 않았습니다.
4. 숨그림자
지하에서 입자들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숨그림자' 종족의 단희는 얼음 아래에서 발견된 원형 인류 조안을 만나게 됩니다. 조안은 발성 언어를 사용하고, 단희는 호흡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의미 통역기를 통해 소통을 시도합니다. 이들의 관계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교류와 이별을 그리며,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을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 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으로.
5. 오래된 협약
벨라타 행성의 사제 노아는 지구에서 온 탐사대원 이정과의 만남을 통해 '오브'라는 신성한 존재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이정은 벨라타 행성사람들의 짧은 수명의 원인이 오브인 것을 알리고 안타까워하며, 노아는 오브와의 오래된 협약에 대한 진실을 편지로 전합니다.
오래전 벨라타 행성에 불시착한 인간은 행성을 지배하던 오브로 인해 발생하는 루티닐이 인간의 뇌를 급격히 손상시킨다는 걸 알고 오브를 계속 죽이지만 행성 자체인 오브를 없앨 순 없었습니다. 수명이 짧은 인간에게 오브는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주기로 하고 깊은 잠에 빠지면서 루티닐이 감소하고, 겨우 인간이 살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이야기는 신념과 진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의 복잡성을 탐구합니다.
'미안해요. 우리가 끔찍한 짓을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들의 행성을 망쳐버렸어요.'
오브들이 묻기 시작하지요. 그들은 궁금해합니다. 이 낯선 존재들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왜 이 행성을 떠나지 못하는지. 이들에게 죽음은 끝인지 시작인지.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대단한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 오브들의 행성을 자신들이 망쳤다고 미안해하는 것을 재미있어하지요.
대화는 이렇게 끝이 난답니다.
'우리의 긴 삶에 비하면 너희의 삶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그리고 그들은 오랜 잠에 빠져들었어요.
6. 인지공간
모두가 같은 지식을 공유하는 '인지 공간'에서, 연약한 몸으로 인해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없는 이브와 그녀를 돌보는 제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브는 인지 공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제나는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이 작품은 집단지성과 개인의 차이, 그리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제 나는 인지 공간을 완전히 벗어나 바깥 세계로 들어섰다. 이곳에서 내가 정확히 무엇을 보게 될지, 인지 공간을 떠난 내가 온전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개별적인 인지 공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임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고, 나는 그 첫 증거가 되려고 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멀어져 온 격자 구조물을 보았다. 자정이 되어 서기관이 인지 공간의 조명을 세 번 깜박였다. 조명 완전히 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어둠에 잠긴 격자 구조물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 공간이었다. 공동의 기억이었다. 한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떠나온 세계이기도 했다.
7. 캐빈방정식
물리학 박사인 언니 현화는 시간 인지 장애를 겪게 되고, 동생 현지는 울산의 관람차에서 발생한 기이한 사건과 언니의 관심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간과 기억,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를 과학적 상상력과 함께 풀어내며, 인간의 인지와 감정의 복잡성을 탐구합니다.
가슴 부근에서 시간의 거품이 톡하고 터졌다. 신경 세포들 사이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시공간의 빈 방울이 자글거리며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야 소문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귀신도 피 흘리는 소년도 아니었다. 국제적 시간 거품이었다. 정상에서 몇 번이나 경험했던,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울렁이는 감각의 근원. 분리된 하나의 주머니 우주와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방금 떠나온 세계』는 각기 다른 세계와 인물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각 단편은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인간과 사회, 기술과 감정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방금 떠나온 세계'가 남긴 것
김초엽 작가의 이야기는 낯설고 먼 미래를 다루지만, 결국 지금 우리의 삶과 감정, 그리고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소설 속 세계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달라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읽다 보면 그 속에서 다뤄지는 주제는 생소하지 않은 얘기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작은 손짓과 용기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 책이 조용히 전해줍니다.
SF가 낯선 분들에게도, 이 책은 충분히 친근하게 다가올 거예요. 저처럼 한 번쯤 세상과 어긋난 적 있는 분들께, '방금 떠나온 세계'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