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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푸른 들판에서 만난 상실과 치유의 순간들

by happyjauin 2025. 5. 9.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으며,  인간의 복잡한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은 단순히 아일랜드 시골을 배경으로 한 단편 모음집이 아니라, 상실과 치유, 그리고 사랑과 용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키건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의 결은 매우 섬세하다. 이번 리뷰에서는 각 단편의 줄거리를 중심으로, 내가 느낀 감상과 함께 이 소설집이 주는 울림을 나누고자 한다.
 

줄거리

1. 작별 선물 : 상실과 부끄러움의 그림자

이야기는 독특하게도 2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막내딸로,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오랫동안 아버지의 침실을 대신해 온 인물이다. 가족의 침묵과 수치심 속에서 소녀는 오빠의 다정함과 잠긴 문이 주는 위안을 느끼지만, 드디어 아버지의 말을 몰래 팔아 비행기표를 사서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이별의 순간, 주인공은 지난 시간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안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키건은 이 짧은 이야기 안에 가족 내에서의 상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P.27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ㅡ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ㅡ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2. 푸른 들판을 걷다 : 사제의 고독과 치유

표제작인 이 소설은 아일랜드 시골에서 열린 결혼식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인 사제는 그가 사랑했던 연인의 결혼식이 끝난 후, 마을로 돌아가는 대신 들판을 걷는다. 들판을 걷는 동안, 사제는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고, 중국인 치료사를 찾아가 결국 고요한 평화와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의 현실을 예리하게 그리면서 종교적 역할과 인간적 욕망 사이의 갈등, 그리고 치유의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사제는 성직자라는 역할의 고독함과 세속적인 뜨거운 삶 속에서 갈등하다,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다.
 

P. 64
홀씨가 된 그 모든 민들레 꽃을 ,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녀를 사랑하겠다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그 모든 일들을 온전히 기억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지, 곧 부활절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성지주일 강론을 준비해야 한다. 그는 길을 향해 들판을 다시 오르며 사제로서 나무들의 라틴어를 최선을 다해 반복하는 내일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3. 검은 말 : 사랑의 상실과 자기 위로

 

이 단편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브래디는 장도 보고 공과금도 내고 외식도 시켜달라는 그녀의 말에 꺼지라고 말하고, 그녀의 말까지 쫓아낸다. 그 날이후 둘 사이는 예전 같지 않다. 그는 자신의 감정적 무지함 때문에 결국 사랑을 잃고, 그 비참한 마음을 술과 꿈으로 달랜다. 키건은 남성의 내면에 자리한 상실과 후회, 그리고 그로 인한 자기 위로의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P.79
잠이 그를 덮칠 때 이미 그녀가 거기 있다. 그녀가 창백한 손을 그의 가슴에 올리고, 그녀의 검은 말이 그의 들판에서 다시 풀을 뜯는다.

 

 

4. 삼림 관리인의 딸 : 가족과 진실의 무게

이야기의 주인공 마사는 아하울에 정착한 삼림 관리인 디건의 아내로, 사랑이 결핍된 돈 밖에 모르는 남편과 세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가족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디건이 한 마리의 개를 훔쳐와 딸에게 선물한 이후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더한다. 개의 주인이 나타나 개를 데려가고 딸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그것을 본 마사는 숨겨온 과거의 진실을 말한다. 그날밤 주인으로부터 도망쳐온 개를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해, 모자란 둘째 아들은 성냥에 불을 붙이고 그로 인해 집이 불타고 만다. 이 작품은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P.140
이제 아하울에 등을 돌려야 한다.
......
디건은 무감각하지만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다. 과거의 고역은 사라졌고 새로운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웅덩이에 불길이 비쳐 은처럼 밝게 빛난다. 디건이 생각을 붙잡는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이건 그저 집을 뿐이고, 그들은 살아 있다.

P. 141
자기가 만든 농장을 잃은 아들이 제일 힘들어한다. 아이가 했던 모든 노고가 자기 잘못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생긴다.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을 바라본다. 그 누가 피웠던 것보다 더 큰 불이다. 길 끝으로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 더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잠자리를 내주겠다고 말한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아이가 따라가면서 계속 속삭인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5. 물가 가까이 : 삶의 깊이에 대한 두려움과 성장

이 소설의 인물들은 겉보기에 풍요로운 보이는 환경과 달리, 각자 내면의 공허함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하버드 대학을 다니는 청년은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소유한 고급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낸다.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난 어머니와 백만장자 새아버지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불편한 식사 자리에서 나와 해변을 산책하고 수영을 하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다. 혼자 항공권을 끊어 떠나려 하지만 그의 어머니를 남기고 차마 갈 수가 없다.
 

P.160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은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6. 굴복 : 사회적 규범에 대한 복종


이 소설의 주제는 권위와 복종, 상처와 성장,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대한 굴복이다. 중사는 어릴 적, 사소한 실수에도 가혹하게 훈육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권위에 굴복하며 내면에 상처를 입고, 성인이 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며 우월감을 느낀다. 약혼녀와의 관계에서는 그녀의 편지를 받고 자유롭고 방탕한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순응하며 자기 욕망을 억누르게 된다. 두 여성(어머니와 약혼녀)은 각기 다르게 중사를 ‘굴복’하게 만드는 권위와 사회적 기대의 상징이다.
 

P.182
그는 그녀의 동네에 들어가면서 골풀을 보았고 그 아래의 진흙이 얕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쓴맛을 느끼면서 산으로 향했지만 반쯤 올라가기도 전에 숨이 차서 자전거에서 내려야 했다. 그는 계속 걸어가면서 자기 미래를, 빵을 두드려 둔탁한 소리를 내는 여자의 앙상한 손과 굶주린 시선으로 빵을 보는 아이를 느낄 수 있었다.

 

 

7. 퀴큰 나무 숲의 밤 : 설화와 현실의 경계

이 소설집의 마지막 단편은 아일랜드 민담과 현대적 삶이 교차하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거릿은 결혼을 약속한 사촌이 사제가 되면서 버림받고 아이를 낳았다가 잃게 된 뒤에 사제가 남긴 집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옆집에 사는 스택은 어머니의 슬리퍼, 아버지의 낚싯대, 잼 병까지 그 무엇과도 이별하지 못한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마거릿은 스택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낳은 후 미신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멈추자 마을 사람들의 괴롭힘이 시작되고 스택은 그녀가 떠날 것을 예감하고 현실이 된다.
 

  P.187
옛날옛적에 시골에서는 어느 집에서나 지금처럼 발을 씻었고, 다 씻고 나면 더러운 물을 밤새 집 안에 두면 안 되기 때문에 밖에 내다 버려야 했습니다. 노인들은 발 씻은 물을 바깥에 버리지 않고 집 안에 두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또 물을 버릴 때는 불쌍한 영혼이나 혼백이 피할 수 있도록 "샤헌!"이라 외쳐야 한다고 항상 말했지요. 하지만 여기서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나는 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_아일랜드 설화 '발 씻은 물'에서

 

 

감상 후기

『푸른 들판을 걷다』의 첫 소설인 '작별선물'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이 책의 읽기 바로 전에 읽었던 클레어키건 작가의 소설『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보이는 보수적이고 권위적, 폐쇄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졌고, 비정상적인 가장의 폭력적인 행동에도 아무도 대항하지 못하는 모습에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궁금해졌다.
 
두 번째 소설 '푸른 들판을 걷다'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나로서는 사제의 깊은 고뇌와 행동을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 사제라는 본분을 잊고 사랑에 빠진 사제의 모습에 비도덕적이라 느껴지다가 사랑하는 이를 놓아줘야 하는 마음에 안타까웠고, 들판을 걸으며 본인의 상처와 현실을 직면하고 종교인으로서 자신을 다시 회복해 가는 모습에 숭고함을 느껴지기도 했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은 모두 가족 간의 대화 부족, 그로 인한 오해, 표현의 서투름, 잘못된 표현 방식등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본인도 상처받는다. 함께하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관계, 그리고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놓아야 하지만 놓지 못하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가족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잘 나타났다. 각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아픔과 상실, 상처가 있지만 마지막은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 극복하고 살아갈 것을 보여준다. 
 
'퀴큰 나무 숲의 밤'은 마을의 일상과 신비로운 설화가 어우러지며, 주인공들은 각자 상실과 치유, 그리고 구원의 순간을 경험한다. 현실과 환상이 섞인 이 이야기는 설화를 잘 이해되지 않아 모호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상실한 상처에서 다시 아이를 위해 마을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극복된 모습이려나?
 

마무리 : 천천히 더듬어가는 치유의 이야기

『푸른 들판을 걷다』를 읽으며, 나는 인간이 겪는 상실과 치유의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 다시 한번 느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때 조금씩 보이고, 그때서야 이야기의 진가를 느끼게 된다. 여러 번 읽어 보시길 권해드린다.

키건의 소설은 단순히 비극적인 이야기를 넘어, 각 인물이 고통을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숨은 용기와 사랑을 일깨운다. 이 책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찾아가는 인간의 여정을 조용히 응원하며, 시간이 지나면 분명 고전으로 남을 작품임을 확신하게 한다.

 

만약 삶의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면, 이 책을 천천히 읽어보길 권한다. 짧지만 깊은 이야기들이 당신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 줄 것이다.

 
푸른 들판을 걷다
초역작 『맡겨진 소녀』와 대표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독서가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아일랜드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신간이 다산책방에서 출간되었다. 『푸른 들판을 걷다』는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하는 작가의 작품이자, 처음으로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1999년 데뷔작 『남극(Antarctica)』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클레어 키건이 과연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 것인가는 당시 해외 평단의 가장 큰 화제였다. 그로부터 8년 후, 긴 침묵 끝에 세상에 꺼내 보인
저자
클레어 키건
출판
다산책방
출판일
2024.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