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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별잡'의 안희연 작가의 산문집 <단어의 집>을 읽고

by happyjauin 2025. 4. 22.

 

 
단어의 집
 



가끔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이 조용해질 때가 있어요. 마치 혼자 사색하고 있던 마음을 누가 조심스레 들여다보고, 말 대신 글로 토닥여주는 느낌. 안희연 작가의 『단어의 집』이 딱 그랬어요.

시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작가 안희연이라는 이름이 낯설진 않으실 거예요. 시집 <당근밭 걷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와 <딴짓하는 시간>이나 <사랑의 잔상들> 같은 에세이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분이더라고요. 시를 즐겨 읽지 않는 저는 최근 방영을 시작한 '알쓸별잡 지중해편'을 통해 안희연 작가를 알게 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어요.

이번 산문집 『단어의 집』은 말과 글, 언어에 관한 깊고 섬세한 사유가 가득한 책이에요. 일상에서 흔히 지나치는 단어들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안희연 작가의 산문집 <단어의 집>은 세 개의 주제로 나뉘어 있어요.

Part 1. 성냥갑에 딱 하나 남은 성냥 같은 말 – 잊힌 단어의 온기를 다시 불러내다


책의 첫 번째 파트는 단어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해요. 작가는 우리가 너무 쉽게 흘려보내는 말, 그 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천천히 짚어줍니다.
 

규모

규모나 규격은 모두 틀, 하나도, 범위를 포괄하는 말이지만 규모는 차이가 존중되고 확장 가능성이 있는 반면 규격은 어쩐지 답답한 느낌이 든다.

 
 
'규모'라는 글에서 작가는 찬장 속 잔을 보면서 '잔마다 어울리는 커피, 차가 있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인간의 몸도 잔이라 생각하면 '무엇을 담을 것인지, 담길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요.

 

잔을 보고 규모와 규격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나무늘보의 느림을 게으름이라 오해한 자신을 돌아보며 동물, 인간 모두 각자 어울리는 삶의 속도와 방식이 있듯 각자의 잔에 맞게 잔의 외형, 크기로 차별당하거나 파괴당하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규모를 존중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적산온도

봄에 꽃이 피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가 있는데 봄이 되면 식물들이 몸 안에 온도를 '저금'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렇게 저금한 온도가 가득 차면 비로소 꽃의 피게 되는 것이라고.
......
그 과정에서 '임계점'이라는 단어도 다시 돌아보게 됐다. 지금껏 내게 임계점은 어떠한 한계를 강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 놓친 풍선이 공중으로 날아가다 기압으로 인해 펑 터져버리는 순간 같은. 견딜 수 없는, 용서할 수 없는
......
임계점은 한계가 아니라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식물이 온도를 저금하다가 적정온도에 도달하면 꽃을 피우는 것처럼 인간도 적정온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임계점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크게 성장한다'는 말은 예전부터 자기 계발서나 여러 강의자들에게서 읽고 들은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임계점이 어디인지, 임계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래서 게임이나 핸드폰 충전상태처럼 '임계점까지 얼마가 남았는지 알려주는 기능'이 있다면, 견디고 버틸 힘이 더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는 뉴스의 일기예보에서 나온 '적산온도', 사진 속 찬장에 있는 '잔', 이렇게 우리가 무심코 넘기는 물건과 단어에서 의미를 찾고, 또 의미를 부여해요. 이러한 접근이 생소하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시인이라 단어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거창하고 비싸고, 특별한 것만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주변에서,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보고, 의미를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이 부럽고 본받고 싶어요.
 

 

Part 2. 홀로 짓는 표정 같은 말 – 말로는 다 담지 못하는 마음의 결


두 번째 파트에서는 '표정 같은 말'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말이라는 게, 사실 전부를 다 담지는 못하잖아요. 어떤 감정은 표정에서 더 진하게 느껴지고, 어떤 마음은 침묵 속에 더 크게 들릴 때도 있으니까요.
 

루어

루어낚시는 살아있는 진짜 미끼가 아니라 인조 미끼를 달아 물고기를 낚는 방식을 이른다... 저수지에 갇힌 물고기들도 나름으로 생태계의 이치를 파악하고 위기에 대처하는 능력을 길러왔던 것이다. 가짜 미끼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낚싯대는 예상 가능한 위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걸려드는 몇 마리는 있기 마련이지만.

 

 

작가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루어' 낚시 장면을 보고 한 편의 우화를 상상해요.

 

낚싯대를 드리운 인간 자리에 신을, 물고기의 자리엔 인간을, 물속에 있는 동안은 삶, 미끼를 물어 물밖으로 끌려 나온 순간은 죽음을 맞는 것. 그럼 여기에서 신이 낚시를 하는 이유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아니면 저수지=인간계의 개체수 조절을 위해 주기적으로 인간을 솎아내는 것일까? 그리고 인간도 인간 나름대로 가짜 미끼인지 아닌지 변별할 능력을 그동안 연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덥석 미끼를 물어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지 않을까?

 
비유가 그럴듯하지 않나요? 저는 이 우화가 흥미로우면서도 리얼해서 "아무리 힘들어도 미끼를 물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작가는 이 우화처럼 지금 본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미끼를 물어버려, "볼 것을 보지 못하거나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본인의 경험을 통해 얘기해 줘요.


작가는 답답하고 무기력했던 어느 날, 길에서 간판 '미친 양복점' 옆  '쎄한 세탁'을 보게 돼요. 하지만 잠시뒤 '미진 양복점' 옆 '새한 세탁'이라는 걸 깨닫죠. 그 순간 작가는 "내가 지금 탁하구나. 어리석구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도 문제지만 보이는 것만 보는 것도 문제구나. 보여줬는데 못 보는 건 더 심각한 문제구나." 하고 눈앞에서 진짜 같은 가짜 미끼가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깨닫게 되죠. 

 

 

덧장

지는 것 : 어찌할 수 없음. 울화가 치밀고 끝장났다는 생각, 마침표를 찍을 수 없음(분해서), 멸시, 비하, 자괴, 얼굴 위로 진흙이 줄줄 흘러내린다, 헛웃음이 나오는, 두더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폭죽놀이의 잔해, 생매장, 팔다리가 분리된 마네킹, 소라껍데기(귀를 대면 '함부로 엿듣지 마!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를 지나 '그러려니'의 상태에 접어들기까지의 시간(의외로 짧음)

비기는 것 : 어찌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음(괜찮은 것과 나쁘지 않은 건 어떻게 다를까?), 목탁소리, 한낮의 저글링, 유유자적, 오래 목말랐던 자가 느끼는 물 한 방울의 무게, 언덕을 오르면 펼쳐지는 풍경, 김이 모락모락 마는 만두(신의 조각품), 고디바 소프트 아이스크림(최상급의 신의 조각품)

적고 보니 명확해진다. 지는 것은 주로 분노와 닿아있고 비기는 것은 자족과 닿아 있다.

 
평소 '비김'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던 작가는 친구의 '비긴 걸로 해라. 슬프니까'라는 조언에 그날부터 '비긴 일의 목록'을 쓰게 돼요.
 
우리도 살다 보면 억울하고 분하고 '졌다'라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잖아요.  '졌다'라고 생각하면 화도 나고 분노, 자괴감으로 힘들 수 있지만 '비겼다'로 생각하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비긴 걸로 해라. 슬프니까'라는 친구의 조언은 왠지 따뜻하게 다가오고 위안이 되네요.
 
 

Part 3. 나의 작은 말들의 놀이터 – 단어로 만든 나만의 공간


마지막 파트는 단어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간, 일종의 놀이터에 대한 이야기예요. 글쓰기란 결국 단어로 자신만의 세계를 짓는 작업이잖아요. 안희연 작가는 이 작업을 굉장히 성실하고 섬세하게 해요.
 

모탕

글쓰기는 나무 패는 일을 닮았다. 처음 생각은 통나무에 가까울 것이다. 그 통나무는 분명 생각의 모태지만 땔감으로 바로 쓸 수는 없다. 땔감이 되려면 우선 통나무를 톱으로 잘라 들어 옮길 수 있는 크기로 만들고 , 다시 그것을 여러 번의 도끼질로 쪼개 장작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궁이에 들어갈 만한, 불이 잘 붙을 만한 형식을 갖춰야 한다. 도끼질이 서툴고 능숙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가진 힘과 믿음의 세기로 내려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언제나 '모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탕은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 놓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모탕이 있기에 우리의 글쓰기는 토대를 얻는다. 안정감과 탄력을 얻는다. 결국 보통은 '좋은 질문'에 다름 아니다. 

 

 "선생님, 그런데 태풍이가 왜 우리 학교에 와요?" 


태풍이 부는 어느 날, 학교에서 조기 귀가 조치를 받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서 시작된 생각은 '모탕'이라는 단어로 흘러가요. 평범한 어른이었다면 "태풍은 학교에만 오는 게 아니야!", "엉뚱한 소리 말고 빨리 집에나 가!" 고민 없이 이렇게 말했겠지만 작가는 순수한 아이의 질문에 맞는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해요.

이렇게 그녀는 작은 말 하나를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굴려보고, 그 말이 가진 질감과 온도를 느끼며 써 내려가요. 책 속에는 실제로 본인이 단어와 씨름하며 글을 써왔던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글을 쓰고 싶어 진답니다.

저는 이 파트를 읽으며 제 블로그도 ‘단어의 놀이터’로 가꿔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잠깐 머물다 가도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그런 공간 말이에요. 글이 어렵고 거창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단어로 옮기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줬어요.



 

단어로 만든 작은 집, 그 안에서 우리는 쉬어갑니다


『단어의 집』은 말과 글, 마음에 대해 조용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산문집이었어요. 시끄럽고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책이랄까요. 작가의 글은 과장되지 않아서 좋고, 일상에 발 딛고 있어서 더 깊게 와닿아요.

책을 읽고 나면, 앞으로는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말 대신 “힘들었겠다”, “내가 곁에 있을게” 같은 따뜻하고 진심 어린 말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은 사라지지만, 그 말이 만든 온기는 오래 남는다는 걸 이 책이 알려줬으니까요.

혹시 요즘 마음이 복잡하고,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있다면 『단어의 집』을 한 번 읽어보세요. 분명, 마음 한편이 조용히 정리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엔 또 다른 책 이야기로 찾아올게요. 오늘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단어 한 줌, 곁에 두시길 바랍니다.